짧글
2025.03.20 12:56
소리를 듣는 자가 있는가? 아니면 "소리를 듣는 자가 있다"는 생각이 있는가.
소리는 그냥 내게 들려온다.
소리를 않으려고 해봐라.
듣는 자를 통해서 소리를 들어보지 않으려 해봐라.
보는 것은 내가 보려고 하지 않아도 보인다.
눈을 뜨고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고 해봐라.
보는 자를 통해 보지 않아보아라.
생각은 내가 생각을 하려고 하지 않아도 여전히 생각이 나타난다.
생각을 멈춰봐라. 멈출 수 있는가?
그 동안 나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하는 자로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아보아라.
위에 것들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나는 삶의 행위자가 아니다.
지금 이 경험은 아무런 노력 없이 나에게 나타나며 그저 나타난다.
그것을 매번 나라는 행위자가 한다고 여겼지만, 행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또한 나타나는 작은 생각의 폭죽이다.
금방 사라질 폭죽을 잡아서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개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2022.12.1116:08
누군가를 '진심'으로 미워하는 순간 내가 앎이 떨어졌음을 인지해야 한다.
그 누군가의 생각, 사상을 미워하되 그를 미워하지 말라.
그는 자신이 들고있는 똥이 똥인지 모르고 사랑스러운 자식으로 보이는 착각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내면의 참나와 멀어져있다면 본인이 쥐고 있는 그 똥에 이끌려 다니는 안타까운 한마리 동물일 뿐이다.
2022.11.815:30
자의식을 소중히 여기며 자신의 느낌, 감정, 생각을 소중하게 여길 수록 이는 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을 나누게 된다.
이는 나와 나 아님의 갈등을 유발하며, 삶은 고통 속으로 젖어든다.
이는 깨달음의 과정에 마음을 비우는 것이 포함되는 것과도 연관이 되어있다.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화, 상황, 관계, 경험 속에서 내게 주입된 것이며 실체는 없으므로 이 허상에 매달리는 것은, 허상임을 알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 속으로 나라고 생각하는 것을 찾아보아라, 찾았다면 그것은 내가 아니다.
내가 나라고 생각 하는 개체를 찾은 순간 이미 그것은 인식의 대상일 뿐이다.
인식의 대상은 진정한 내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인식의 대상을 인식한 주체가 진정한 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 진정한 나는 찾을라 해도 찾을 수 없다.
그것은 공(空)이기 때문이다.
2022.10.3117:23
마음 속을 들여다 보는데 자꾸 떠오르는 시끄러운 잡음이 내 눈 앞을 가린다.
흥분된 마음, 지루함을 못참고 게임, 유튜브, SNS를 틀고 싶은 충동들이 나를 휩쓴다.
이들이 그 깊숙히 감춰져있는 신성한 고요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한다.
2021.11.308:26
물방울은 하늘로부터 분리되어 지상으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각각의 분리된 물방울들은 저마다의 꿈을 품은채 누구는 나무 위로, 누구는 바위 위로 떨어진다.
그 물방울이 흘러흘러 강으로 모여들고 바다가 되었을때 그 물방울의 꿈은 덧없음이 되었다.
물방울이 떨어질때부터 바다가 될 운명이였다면, 물방울은 곧 바다고 바다는 곧 물방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본인 스스로가 오로지 물방울인줄 알고 있을뿐이다.
지금 이 순간 호수에 있는 자든, 강을 따라 흘러가는 자든, 그는 이미 바다이다.
개개인의 꿈은 바다라는 거대한 하나의 꿈으로 모여들게 되어있다.
2021.10.1301:07
대기권을 빠져나가지 못한 로켓은 결국 추락한다.
우주와 대기권 사이의 아슬아슬할때 안심하고 추진력을 잃어버리는 순간 추락밖에 남지 않았다.
본인이 추락하고 있는 것을 모른채, 바닥까지 떨어지고 나서야 깨닫는다.
2021.10.1301:02
이 세계는 내가 곧 주인이라는 명료한 자각을 잃어버리는 순간
무명의 존재로써 영화의 엑스트라가 되어 살아간다.
2021.8.2701:09
근원을 창조하고 그로부터 환상이 나온다. 환상의 뿌리는 하나이며 그 근원은 영원하며 불멸하다. 분리되어 보이는 현현(顯現)을 이루어낸 질료는 하나에서부터 탄생했기에 모든 것이 결국엔 하나임을 깨닫는다. 이것이 하나님을 하나라 부르는 이유다.
성령, 에고, 아트만, 참나, 육체, 공기, 물, 지구, 우주, 시간, 공간 ... 존재의 그 모든 것이 뿌리가 하나임이며 그로인해 내가 모두이고 모두가 나이며 하나는 모두이고 모두는 하나이다.
이것이 분리되어 보이는 것은 해당하는 질료에 의해 현현하여 "그렇게 보일" 뿐이다.
2021.8.2700:59
존재의 바탕이 없는 허상에서 태어난 그는 늘 두려워하고 공포에 떨며 쉽게 좌절하고 슬퍼한다.
그의 정체는 거짓이기 때문에 스스로가 거짓이라는 것이 밝혀질까 늘 기만하고 움츠리고 두려워한다.
실재를 슬쩍이라도 보면 그 동안 굳건히 믿었던 환상에 의심을 품고, 환상을 환상임을 알았을때 실재가 보이기 시작한다.
2021.8.820:34
찰흙으로 빚어진 것들이 제 몸에 열심히 모양을 내고 페인트를 바르더니 스스로가 찰흙으로 만들어진지 모르더라.
그러고선 찰흙을 열심히 숭배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몸이 찰흙으로 빚어졌다는 것을 모른채...
정작 그들이 숭배하는 것은 그들이 만들어낸 상상의 산물일 뿐이다.
본질을 모른채 페인트의 세상이 만들어낸 개념을 믿고 있다.
그들 스스로는 진실을 믿는다 생각하지만 실상은 진실을 모르는 자들이 만들어낸 개념을 믿는다.
코미디나 다름 없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것이 진실이라 믿고 온 시간을 허비한다.
그 어떠한 변명도 소용이 없다. 내 안에 모든 진실이 있기 때문에 그 무엇도 필요가 없다.
오직 자신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2021.8.711:07
여러 문헌에서 말하는 카르페디엠, 현존, 이 순간에 자각하기에는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나도 겪었었다)
카르페디엠의 번역처럼 "현재를 잡아라" 또는 현존은 "현재에 존재하라"는 시간을 바탕으로 하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에 시간에 얽매인다.
이는 유튜브를 플레이하다 일시정지를 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플레이를 하는 순간 존재를 잊는다.
핵심은 시간 이전의 존재. 시간을 인식하는 주체로써 있는 것이다.
그는 시간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
그가 인식함으로써 시간이 탄생하였다.
유튜브로 치자면 타임라인을(과거, 미래) 진행하며 매 순간의 프레임을 해석하여 보여주는 그 주체이다.
현재를 현재로써 인식하게 해주는 존재가 없으면 미래도 과거도 없다.
그 존재 안에서 시간이 인식 되므로 시간의 진행 여부와는 상관 없이 유일하고 영원한 존재로써 있을 수 있게 된다.
2021.8.621:58
조그만한 속삭임이 느껴진다.
매 순간 늘 나에게 전하고 있다.
다만 소음에 묻혀 듣지 못했을 뿐이다.
온갖 노이즈와 같은 생각과 감정으로 가득찬 작은 나를 내려놓을때 비로소 속삭임이 느껴진다.
그것을 듣지 못하면 내가 원하는 삶에서 자꾸만 파도에 휩쓸리듯 멀어져 간다. 늘 무언가에 휘둘리고 무지 속에서 무명의 존재로서 지나간다.
반항하려 하지 말아라. 내가 진정으로 깨어 있으면 알 것이다.
속삭임은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려고 내게 전하고 있다는 것을...
2021.8.304:32
모두가 자고 있는 세상에서 활동하기에 가장 좋은 상태는 한쪽 눈은 뜨고 한쪽 눈은 감고 슬쩍 보는 정도의 깨어남이다.
한쪽 눈으로는 진아를, 한쪽 눈으로는 눈을 감고 무지를 보라.
진아의 상태로 무지를 흉내내어라.
한쪽 눈을 감아도, 그대가 뜬 한쪽 눈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이것을 매 순간 하는 것이 현재 나에게 있어 제일 필요한 수행이다.
2021.8.208:22
빛을 등지고 자신의 그림자를 본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보며 세상은 어둡다고 한탄하며 괴로워한다.
빛이 강해지면 강해질 수록 자신의 그림자도 짙고, 커진다.
빛이 그를 비출수록 그의 어둠은 강해진다.
빛의 약해지면 공간이 어두워진다.
그러면 그는 또 주변을 보며 세상이 어두워졌다고 한탄한다.
어둠을 보려는 자는 빛이 강해지던 약해지던 어둠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가 그저 뒤를 돌아 그에게 내리쐬는 빛을 보았을때, 그때서야 빛을 보는 것은 몸을 돌리는 것 만큼 쉽다는 것을 알 것이다.
2021.8.114:18
어떠한 사건이든 어두운 면이 있다면 밝은 면이 있기 마련이다.
이때 어둠을 선택하냐 밝음을 선택하냐는 나의 선택에 따라 달려있다.
깨어있지 않은 무의식의 상태에서는 선택할 수 없다.(평소 하던 그대로 할 것이다.)
잠에서 깨어나서 의식의 중심으로 이동하라.
깨어난 후 "이 일로부터 내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아라.
이 질문으로 인해 유용함을 찾아내어라.
그리고 그 사건으로 부터 저항하지 말고 순순히 따르도록 하여라.
저항하지 말고 동의하며, 불쾌감을 표출하지 말고 귀 기울여 타협하며 이전에는 거부하고 대치하던 것들을 받아들여라.
이 것만 지키더라도 스스로를 나락에 떨어트리는 일은 없어진다.
일어나는 시련들이 과거에 내가 거부하고 저항하던 것들이 다시 돌아왔음을 이제 알겠는가?
물론 그것 또한 의미가 있다.
그렇게 다시 돌아옴으로 인해 깨어나서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것인가 하는 선택지가 생긴 것이다.
이것을 한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것이고, 하지 않는다면 뫼비우스의 띠처럼 알아차릴 때까지 반복할 것이다.
2021.8.111:12
현실을 바꾸려 하지 말거라. 현실이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
알아서 하게끔 내버려두어라.
다만, 내 창조의 불꽃을 통해 현실에게 가야할 길을 비추어주어라.
2021.7.2409:55
천재는 – 작업이나 업적에서 – 필연적으로 낭비하는 자이다.
전력을 다한다는 것. 이것이 그의 위대함이다...... 말하자면 자기 보존 본능이 풀어져 있다.
발산되는 힘의 압도적인 압력이 그에게 그러한 보호와 신중함을 금한다.
— 《우상의 황혼》, 나의 천재 개념 - 프리디리히 니체
2021.7.2401:50
사랑, 고통, 희망, 절망, 외로움, 행복, 불행, 슬픔, 화남의 실체는 없다. 우리가 만들었다.
그것들의 실체가 무엇일까? 우리가 부여한 개념만 있다.
그것들은 하나이다. 여럿이 된 것은 우리가 이름을 붙히고 구분하고 분리하고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 감정에 대한 모든 수식어들을 배제하고(단어로 표현된 순간 이미 구분지은 것이다) 온전히 그 감정을 그대로 느껴보면. 그저 에너지의 맥동이 있을 것이다. 차이는 있다. 그러나 그 차이는 빨간색과 파란색의 파장 차이가 다르듯이. 에너지의 파장이 다른 것 뿐이다.
그것에 외로움이란 이름을 붙히고 스스로 외로움이란 개념에 빠져들어 외로움을 느낀다. 이것은 내가 나에게 감정을 주입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트릭이 있다. 굳이 기분 좋은 감정을 피할 필요는 없잖는가.
행복, 즐거움, 설레임 같은 긍정적인 감정은 지금처럼 잘 스스로에게 개념 부여를 해서 행복하게 써먹는다.
슬픔, 외로움, 고통, 우울함, 절망 등의 부정적인 감정은 개념을 부여하지 말고 온전히 그 파장을 느껴보자.
눈을 감고 가만히 지켜보자. 심장이 두근거리며 느껴지는 감정의 파장. 그것은 그저 어떤 색상을 가진 에너지일 뿐이다.
너울거리는 보라빛을 띄는 어두운 파란색의 파도, 검정색과 함께 소용돌이치는 강렬한 빨간색.
숨이 막히게 아름답다. 그 자체로 훌륭한 예술이다.
2021.7.2202:14
햄스터가 쳇바퀴 굴리듯 달리기를 한다.
지금 어디쯤 왔지? 하고 뒤를 돌아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새 쳇바퀴는 더 단단하고 커져있다. 내가 더 열심히 달릴 수록 더 커져만 간다.
어두컴컴한 상자 밖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나갈려고 두드리니 부딧치는 쇳소리가 내 속에 유리 파편처럼 파고든다.
가만히 눈을 닫고 모든 것을 체념한다. 나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을 거야... 꿈꾸던 보랏빛 꿈이 녹아내린다. 그것은 내 몸과 섞여 타르처럼 검고 끈적해져 녹아내린다.
공간도, 시간도 같이 흘러 녹아내린다. 시각도 소리도 감각도 희망도 직감도.
어느덧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는다. 굳게 잠겨있던 상자도, 쳇바퀴도 없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다시 탄생한다. 다시 탄생한 것은 조금 더 빛나고. 조금 더 아름답다. 그리고 이내 녹아내린다.. 다시 태어난다. 이 영원한 반복마저 녹아내린다. 볼 수 있는 눈도 없고 감각도 없고 생각도 감정도 없이 찰나에 무한번 반복한다. 이 무한에서 어떠한 잔여물이 생겨난다. 그것은 마치 그 과정을 잊어버린듯 다시 쳇바퀴와 상자를 열심히 만들어낸다. 만듦으로 인해 다시 녹아내린다.
죽음은 탄생으로 부터 나왔으며 탄생은 죽음으로부터 나왔다. 그러니 탄생을 시킨다면 곧 죽는 것이다. 쳇바퀴와 상자를 만든다면 그것은 곧 그 속에서 체념할 나였던 것과 함께 녹아내릴 것이다. 그것을 녹이는 것은 온전히 체념한 나의 마음이다.
언제까지 이 반복을 계속 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 안에 있는 자는 모른다. 눈은 눈을 볼 수 없다. 그것을 지켜보는 자가 개입하여 멈출때까지 끝 없이 반복할 것이다.
2021.7.1721:30
"잘 해보려고 열심히 했지만 나의 존재는 고통 밖에 되지 않았어."
흐르는, 흘리는 눈물이 그저 안타깝다.
자신이 최선인 줄 알았던 그는 스스로가 고통의 근원임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힘을 잃는다.
영혼 깊은 곳에서 절규하며 우는 그를 그저 쳐다볼 수 밖에 없다.
그것을 보고 어떻게 꾸짖을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건 그저 용서 밖에 없었다.
2021.7.301:19
내가 누군가가 바보 같아서 싫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멍청해서 듣기 싫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내 깊은 의식 속에 나를 바보 같다고 생각하고 멍청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바보같고 멍청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하여 외부에 투사하여 공격하기 시작한다.
남에게서 유난히 보기 싫은 측면들은... 실은 내가 나 스스로에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회광반조라는 말에도 있듯이, 작은 나를 이해할때 내가 외부에 투영하는 것을 통해 알아차리리라.